연애시 추억 2 정일근  (Homepage) 2017-07-11(화) 06:05:52, 7109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을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김남조 / 편지 ~~~~~~~~~~~~~~~~~~~~~~~~~~~~~~~~~~~~~~~~~~~~~~~~~~~~~ 김남조 시인의 ‘편지’를 눈물로 읽던 시간이 내게 있었다. 백지 위에 연필로 또박또박 그 시를 옮겨쓰던 통점(痛點)의 시간이었다. 그 백지 위에 뚝, 뚝 눈물이 떨어지던 슬픔의 시간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사랑의 뒤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랑 그 하나에 질주하는 야생마 같은 스무 살이었다. 내 전부를 걸고 사랑하던 문학청년이었다. 사랑과 미움이, 애증(愛憎)이 한 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사랑이 돌아서면서 보여주었던 미움(憎)의 얼굴에 사랑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던 시간이었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오, 이럴 수가! 내가 사랑할 때 그랬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그 사랑이 끝났을 때 그랬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 대목에서 나는 맥이 풀려 그만 울고 말았다. 그 사람에 대한 미움으로 몸을 떨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연애시 그 한 구절에서 막혔던 울음이 터지면서 펑펑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 몸속에 가득 찼던 슬픔을 모두 눈물로 퍼내고서 나는 수평처럼 편안해졌다.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나의 시작이다.’ 나는 사랑의 상처에 돋는 새살을 보며 ‘감히 나를 차버린!’ 그 사람을 용서하기로 했다. 용서하는 것이 내가 한 사랑에 대해 존중하는 자세라고 생각했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나도 그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지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한 자도 쓸 수가 없었다. 그냥 백지 편지 한 장을 보내는 것으로 이뤄질 수 없었던 사랑에 ‘하얀 마침표’를 찍었다. 연애시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사랑으로 아픈 영혼을 위무하는 치유력이 있고, 또 다시 생생하게 가슴 뛰는 그 시간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복원력이 있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나의 백지 편지를 받은 그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지금도 그 편지를 보관하고 있을까?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그 주소로 다시 긴 연애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시여 침을 뱉어라’고 말한 김수영 시인도 “잘 하면 이제부터 정말 연애시다운 연애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쓰게 되면 여편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쓸 수 있는 연애시를, 여편네가 이혼하자고 대들만한 연애시를, 그래도 뉘우치지 않을 연애시를 쓸 수 있늘 것 같다”고 1968년에 썼다. 김수영 시인은 그 글을 발표한 1968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았더라면 우리는 그의 ‘여편네가 이혼을 하자고 대들만한 연애시’로 행복했을 것이다. 내가 읽고 싶은 것은 쓰여 지지 않은 연애시다. 지금 뜨거운 사랑으로 사랑에 눈먼 시인이 그 사랑이 끝난 뒤 남길, 성숙한 영혼이 주술처럼 쏟아낼 그 연애시를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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