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말 그릇 김영국  (Homepage) 2020-03-24(화) 20:12:09, 12063

사람마다 그 말을 담는 그릇이 있다. 사람에 따라 말 그릇의 깊이 넓이 모양 재질이 각기 다르다. 지도자 특히 대통령의 말 그릇은 깊고 넓고 둥글어야 한다. 얕고 좁으면 말 때문에 권위에 손상을 입거나 신뢰를 잃고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대외적으로는 국익 국격이 훼손되기도 한다. 둥글지 않으면 국민을 아우르지 못하고 분열시킨다. 입구가 적당히 열려 있어야 한다. 사구(장독의 뚜껑처럼 생긴 옹기)처럼 너무 열려있으면 속이 다 보여 카리스마가 없어지고, 목이 긴 항아리처럼 너무 좁으면 소통 부재라는 말을 듣기 일쑤다. 문대통령이 민정수석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보좌하는 모습이 진중해 보였다. 그 진중함이 그분을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런데 취임 초 몇 장면에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인천공항을 방문한 자리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하였다. 이분이 현실을 얼마나 파악하고 저런 꿈 같은 말을 섣불리 하는 걸까. 학교가 얼른 떠올랐다. 기간제 교사, 급식실의 조리사 아줌마들, 임시로 고용한 청소부 경비원 등 이분들을 다 정규직화하겠다는 것인가. 그 뒤에도 여전히 말 그릇의 깊이와 넓이와 모양에 실망을 거듭했다. 재난 시에 지도자의 말 그릇이 백일하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코로나 사태에서 대통령은 말 그릇의 바닥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 시장을 만난 자리에서 지금의 대처 수준을 전 정권과 견주어 평가해보라는 장면이 TV에 나왔다. 내 낯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그분의 입에서 ‘종식’이라는 말이 나오고, 여기에 맞추어 국무총리가 마스크를 벗고 악수를 하며 시장을 돌아다녔다. 급기야 주무장관은 예정된 집회를 취소하지 말고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 나흘 뒤 신천지 집회가 열리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긴장의 끈을 놓아가던 국민들은 마스크를 찾기 시작했으나 마스크는 이미 중국으로 다 건너간 뒤였다. 마스크를 사려는 국민들이 우중에 장사진을 치고, 마스크에 대한 대통령과 정부의 말은 깃털보다 가볍게 나부꼈다. 그런 와중에 대통령은 정부의 방역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확진환자들이 입원 중이고 대구에서는 병실이 없어 집에서 대기하다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 방역이 세계 표본 또는 모범이라고 반복해서 자찬하였다. 혹 휘하의 관료가 그런 자랑을 하더라도, 대통령은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라고 책망했어야 했다. 환자와 사망자 그리고 그 가족들, 마스크 전쟁에 분통을 터뜨리는 국민, 당장 먹고 살기가 막막한 서민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말이다. 그분의 말 그릇엔 따뜻한 위로의 말, 사과의 말은 아예 없는 것 같다. 문득 취임 초의 또 한 장면이 떠오른다. 낚싯배가 야밤에 화물선과 충돌하여 몇 명이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대통령은 즉각 “전적으로 국가의 책임”이라며 다음날 청와대 회의에서 단체로 묵념을 했다. 그런데 초기 대응 실패로 온 나라가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데 대통령과 당정 관계자들은 이 재난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언사가 난무하고 있다. ‘사람이 먼저’라는 구호, 몇 명의 사고사에 묵념까지 하던 초심과 지금의 언행이 너무 동떨어져 국민은 황당할 뿐이다. 지도자의 말 그릇의 이상형은 웅숭깊은 장독이 아닐까 한다. 들여다보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고, 잘 곰삭은 각양각색의 말이 넉넉하게 들어있는 큰 장독 말이다. 대갓집 마님은 그 장독의 뚜껑을 헤프게 열지 않는다. 일단 열면 맛깔 나는 음식을 푸짐하게 만들어낸다. 그런 말 그릇을 지닌 지도자의 전형은 처칠이라고 생각한다. 패전의 공포에 떨고 있는 국민에게 용기와 투지를 심어주고, 적전에서 사분오열된 국론을 하나로 묶어내고, 그런 가운데서 특유의 유머로 웃음을 안겨주어 이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어낸 힘의 근원은 그의 그 넉넉한 말 그릇에서 비롯되었다. 우린 언제쯤 그런 지도자를 만날 수 있을까. *‘말 그릇’이란 말은 작가 김윤나의 책 <말 그릇>의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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