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된 기적들4-자동차 김영국  (Homepage) 2020-07-06(월) 08:02:46, 16467

익숙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낯설고 서투를 때 얼마나 서먹하고 불안하고 불편하던가. 익숙함이 쌓이면 일상이 된다. 일상은 편안하다. 그러나 일상이 되면 잃는 것도 있다. 설렘도 초심도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된다. 고마운 것도 당연한 것이 되고, 재미도 감탄도 없어진다. 그래서 가끔은 일부러라도 그 불편했던 처음을 떠올리고 되살리라고 한다. <익숙해지지 마라. 행복이 멀어진다.>는 책도 아마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좋은 예술 작품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나 때는 말이야” 얘기는 새로운 세상은 아니라 해도 불편했던 처음을 상기시킴으로써 밋밋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게 할 수는 있으리라. 그런 생각으로 이 불편한 글을 이어가고 있다. *자동차 어릴 때 자동차는 괴물이었다. 우리 동네는 면사무소에서 한참 떨어진 작은 마을이었다. 일 년에 군용 지프를 한두 번 볼까 말까 했다. 자동차가 동네 타작마당에 왔다 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다. 타고 온 군인들이 꿩 잡으러 가고 나서도 우리는 내내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다. 떠날 때는 한참 동안 차 뒤를 따라 뛰었다. 배기가스 냄새가 왜 그리 좋았던고. 초등학교 앞에는 진주 삼천포를 잇는 비포장 국도가 있었다. 트럭과 버스가 가끔 지나갔다. 먼지와 매연 속에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중학교는 사천읍까지 20리 넘는 길을 걸어다녔다. 차비가 30환이었다. 버스 창밖으로 팔을 걸치고 머리카락 휘날리는 승객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특히 라이방(썬 그라스)을 끼고 운전하는 아저씨는 저 먼 딴 나라 사람 같았다. 내가 계절에 관계없이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썬 그라스를 끼는 것은 아마 그 영향일 것이다. 나는 내가 차를 사고 차를 운전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 다닐 때니까 60년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연두교서인가를 발표할 때 큰집에서 사촌동생과 함께 라디오를 듣곤 했다. 거기서 나온 꿈같은 얘기가 하나 하나 현실이 되어가고 있을 때라 놓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대통령의 입에서 ‘마이카’, ‘소비가 미덕인 시대’ 얘기가 나왔다. 그분을 하늘같이(?) 믿던 터였지만 그건 너무 나갔다고 동생과 입을 모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에 차가 늘어나더니 내가 살던 연산동 골목에도 자가용이 띄엄띄엄 주차되기 시작했다. 명절에 고향에 가면 차를 끌고 와 세워둔 집이 늘어났다. 부산 등 외지에 나갔던 사람들이다. ‘대학까지 보내 놨더니......’ 부모님의 시선을 혼자 느끼기도 했다. 80년대 중반에 드디어 학교에도 승용차가 등장했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마이카는 무슨 마이카’하며 버텼다.(사실 돈도 없었다.) 그러나 대세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도 그 끝자락에 차를 뽑았다(ㅎㅎ). 은색 르망을 집 앞에 끌고 왔을 때 애들의 감격이라니! 주말이면 으레 온 가족이 드라이브에 나섰고 ,다녀오면 집 안의 수도와 연결된 호스로 요란스럽게 세차를 했다. 아내는 가끔 차를 둘러보며 혹시 흠집을 만들지나 않았는지 점검하기도 했다. 사실 그때 차에 생긴 흠집은 내 살갗의 상채기보다 더 아팠다. 한 동안 차에 커버를 씌우기도 했다. 생애 첫차의 기억은 첫사랑의 그것처럼 애틋하다. 마을에 지프 한 대 들어오면 그것이 사건이었던 그날로부터 70 년이 흘렀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골목마다, 주차장마다, 그것도 모자라 도로에도 차가 가득가득 넘쳐나고 있다. 탈북민이 인천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도로에 줄을 이은 자동차를 보고 연출인 줄 알았단다. 최초의 국산 자동차 포니가 출시된 것이 1975년이다. 불과 45 년 전이다. 우리나라는 명실상부한 자동차 강국이 되었다. 자동차 원조국인 미국에다 우리의 공장을 세우고 현지인을 고용하여 자동차를 생산하여 팔고 있다. 내 차를 내가 운전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내가 마이카 드라이버가 된 지 30 년이 넘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내 차가 지금은 주차장 어느 곳에 있는지도 잊어버리고 산다. 젊은이들에겐 별일도 아닌 당연한 일상일 것이다. 그러나 저 아득한 바닥에서부터 보고 살아온 나에게는 오늘의 자동차 행렬은 상전벽해 아니 천지개벽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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