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액땜 김영국  (Homepage) 2021-02-21(일) 08:59:50, 16323

설 명절을 앞두고 C선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부산고 시절의 제자다. 아무리 말려도 명절마다 빠뜨리지 않고 찾아왔다. 내가 아프고 난 뒤 대인기피증이 생겼다고 했더니 할 수 없이 전화로 인사를 하고, 카톡으로 케이크나 커피 상품권을 보내온다. 그러지 말자고 해도 막무가내다. 인사를 받고 나도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의례적으로 물었는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선생님 제가 집에서 넘어져 다리를 다쳤습니다. 뼈에 금이 갔습니다. 게다가 코로나 확진자와 접촉하는 바람에 2주간 자가 격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중간에 말을 끊고 무슨 그런 일이 있었냐며 위로하려는데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 올해 제가 운수대통 할 모양입니다.” “그래 맞다. 액땜을 했구나. 그 정도 액땜이면 자네와 가족 모두 두고두고 무고하겠다.” 이 친구는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의족이다. 고1 때 처음 본 그는 뜻밖에도 활달했다. 반장 선거에 나와 떨어졌다. 총무부장을 맡겼다. 그런데 그는 그 직책 이상의 역할을 했다. 반장 부반장을 도와 학급분위기를 주도했다. 여름방학 때 학급 간부들과 진하해수욕장을 간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다들 쭈뼛쭈뼛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가 먼저 수영복 차림으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이 친구를 볼 때마다 이 친구의 자존감이 경이로웠다. 대체 부모님이 어떻게 키웠기에 이렇게 늘 당당하고 밝을까. 이 친구 결혼식 주례를 서면서 ‘존경하는 제자’라고 칭찬했는데 진심이었다. 이번 전화를 받고 그에 대한 존경심이 더 깊어졌다. 그런 사고를 저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니! 이른바 강철 마인드의 전형이었다. 마음 근육이 정말 탄탄한 사람이다. 불가에서는 두 번째 화살을 조심하라고 가르친다. 살다 보면 불상사를 만나기 마련이다. 그것이 첫 번째 화살이다. 그 일을 두고 자책하거나, 남을 원망하거나, 확대해석하여 불운을 탄식하는 것 등이 두 번째 화살이다. 그 일로 다투기라도 하면 세 번째 네 번째 화살이 날아온다. 제2, 제3의 화살을 피하는 정도를 보고 수행의 수준을 가늠한다고 한다. C선생은 이미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음에 틀림없다. 액땜은 다가올 큰 액운을 작은 액으로 미리 때운다는 말이다. 민간신앙에서 유래했지만, 오늘날의 백신과 같은 원리가 아닌가 한다.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원치 않은 일을 당했을 때, 그것도 아침이나 정초에 당하면 오늘 또는 올해 재수가 없거나 불운하겠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것이 두 번째 화살이다. 그것을 액땜이라고 생각하면, 더 큰 불행을 예방하기 위한 백신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안할 것이다. 말이 그렇지, 그게 쉽지가 않다. 그런데 C선생은 그렇게 큰일을 겪고도 액땜했다고 선생님한테 웃으며 얘기했다. 못난 선생은 제자가 이른 경지를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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