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산행 추억 김영국  (Homepage) 2021-04-12(월) 07:09:06, 16759

석포여중은 교감 첫 발령지였다. ‘석포’, 이 얼마나 투박한 이름인가. 더구나 봄날의 들꽃처럼 풋풋하고 예쁜 여중생들에게는 천부당만부당한 교명이 아닐 수 없다. 내심 일반계고등학교 발령을 기대했던 나에게 이 생소한 이름은 실망 그 자체였다. 걸려오는 전화는 하나같이 대체 그 학교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위로 전화였다. 지내놓고 보니, 이 학교 2년은 아기자기한 추억들로 수놓아진 행복한 시절이었다. 일반계고가 아닌 여중에서 교감을 하게 된 것은 삼대적선을 한 사람에게나 오는 행운이라고들 했다. 이 학교는 도심에서 그다지 멀지 않으면서 학교에 들어서면 깊은 산속에나 온 듯 조용하고 청량했다. 교문을 들어서면 벚꽃나무 터널을 한참 지나야 운동장을 만나고, 조회대 내려가는 스탠드는 등나무 덩굴로 지붕을 이루고 있었다. 나지막한 청량산이 학교 건물을 에워싸고 있어 학교라기보다는 아담한 산사나 공원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학교 규모도 한 학년 5학급의 최소 단위였고, 교무실에는 선생님 20여 명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 당시 관리자가 많이 신경 쓰는 부분이 전교조였다. 있긴 있을 텐데 초짜 교감의 눈에는 띄지 않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니, 방과 후나 주말에 자기들끼리 조용히 모여서 결속을 다지는 것 같았다. 지회장 N선생(나중에 부산 지부장이 되었다.)은 태생이 느슨한데다 친화력도 좋아 굳이 의식하거나 경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 선생이 어느 날 내게 달빛 산행을 해보지 않겠냐고 했다. 이름만으로도 구미가 당겼다. 게다가 가을이었다.    보름과 토요일이 겹치는 날 오후 경주 남산으로 출발했다. 보아하니 전교조의 정례행사에 내가 끼어든 것이었다. 산 아래에서 저녁을 먹고 산행을 시작했다. 남산은 익숙했지만 밤의 남산은 정취가 달랐다. N선생은 곳곳의 유적에 대한 설명에 열을 올렸다. 과목은 수학인데 역사 선생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특유의 유머를 가미하여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능선에 오르니 가을 하늘의 보름달이 온 산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숲 사이에 드러난 등산로는 흡사 눈길마냥 하얗게 빛났다. 달빛을 등에 지고 묵묵히 걷는 행렬은 한 폭의 동양화처럼 적요했다. 하산 후 숙소에 들러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일행은 운문사로 향했다. 비구니 학승들의 새벽 예불을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네 시였던가, 다섯 시였던가. 범종이 울리니 수백 명의 학승들이 법당으로 조용히 모여들었다. 이제 막 찬물에 세수를 한 민낯들은 발갛게 상기되어 정갈했다. 우리는 뒷줄에 어설픈 합장 자세로 서 있었다. 대오가 정돈되자 찬불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법당 가득한 여승들의 노랫소리는 법당을 채우고 넘쳐 차가운 새벽하늘로 퍼져나갔다. 노래는 메들리로 계속 이어졌다. 노래 중간 중간에 일제히 절을 했다. 우리도 멍청히 서 있을 수 없어 엉거주춤 따라 절을 했다. 미세먼지 하나 끼지 않은 청정한 목청들에서 울려 나오는 찬불가는 가을의 새벽 공기와 어울려 청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들은 어떤 합창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이 나를 전율케 했다. 뒷자리에서 흘금거린 나는 참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의식이 한창 진행 중인데도 끊임없이 지각생들이 대열의 후미에 끼어들었다. 세수도 안 했는지 눈을 부비며 헐레벌레 들어서기도 하고, 들어와서 비로소 옷매무새를 가다듬기도 하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절을 하다가 그대로 엎드려 자기도 하고,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조는 학승도 있었다. 불청객인 속인들이 바로 뒤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속세에 두고 온 학교 풍경과 너무도 닮아있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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