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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국산화의 주역, 김해수
2017-05-03(수) 15:57:40, 13518
부산과학기술기획평가원(BISTEP)에서 발간하는 계간지인 <기술혁신과 미래부산>의 2017년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bistep.re.kr/sub_03/sub_04_publicationView.do?boardId=22

라디오 국산화의 주역, 김해수
송성수(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 한국과학기술학회 회장)

부산에서 시작된 국산 라디오

우리나라의 기술발전에 실제로 기여한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한국의 기술발전에는 집단적 학습이 중요했기 때문에 특정한 개인이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해당 사업을 이루어 낸 경영자가 부각되는 경향이 커서 실무 엔지니어의 이름이 알려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러한 상황은 최근에 한국의 산업화에 기여한 엔지니어들이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발간함으로써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국산 라디오 1호를 개발한 김해수(金海洙, 1923~2005)가 이러한 예에 속한다. 그에 대한 자전적 회고는 딸 김진주에 의해 2005년에 ≪아버지의 라디오≫라는 책으로 발간된 바 있다.  



<그림> 국산 라디오의 시대를 연 김해수와 그의 자전적 회고인 ≪아버지의 라디오≫

흥미롭게도 국산 라디오가 처음 개발된 공간은 부산이었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인 A-501은 1959년에 금성사(현재의 LG전자)에 의해 출시되었는데, 당시에 금성사의 본사가 부산시 연지동에 있었던 것이다. 현재 그 자리에는 청소년 과학체험관인 LG 사이언스홀이 설치되어 있다.

기술에는 좌익과 우익이 없다

김해수는 1923년에 건어물 교역상을 하던 김종옥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경남 거창이었지만 3살 때 이사하여 하동에서 자랐다. 김해수는 1937년에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갔다. 그는 갑종 중학교인 릿쇼(立正)학교를 다닌 후 1940년에 동경고공(東京高工)의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1943년 봄에 김해수는 인천 조병창의 전기주임으로 갑작스런 발령을 받았다. 태평양전쟁에서 열세에 몰린 일본 군부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병창에 부임하자마자 그곳을 탈출해서 강원도 산골로 숨어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김해수는 강원도 금화군에 있던 창도(昌道)광산의 전기주임으로 일할 수 있었고, 후지모토(藤本) 소장의 도움으로 인천 조병창에서 도주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김해수는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에 고향인 하동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라디오 가게를 헐값에 인수하여 창전사(創電社)라는 간판을 내걸고 일을 시작했다. 김해수는 불량 라디오들을 척척 수리해냄으로써 경남 일대에서 스타 엔지니어로 떠올랐다.

김해수에게는 강대봉이라는 오랜 친구가 있었다. 강대봉이 좌익 성향을 지닌 민주청년동맹(민청)의 지도자 격이었기 때문에 김해수는 민청이 주도하는 집회나 공연에 필요한 무대장치를 설치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민청에 대항하는 우익 단체인 민족청년동맹(족청)으로부터 동시에 협조요청을 받아 가끔은 그쪽 일을 거들어주기도 했다. 김해수는 어느 편이 됐든 기술적 서비스는 공평하게 제공하는 것이 엔지니어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1947년에 김해수는 3명의 친구들과 함께 좌익 청년활동의 핵심으로 몰려 소위 ‘하동군청 방화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됨으로써 모진 시련을 겪었다. 김해수는 끝까지 버텼으며,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얻은 폐결핵 때문에 고향을 떠나 전남 완도군에 있는 소안도에서 요양을 했다.

1950년 9월에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김해수는 화평전업사(和平電業社)를 개업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1954년 3월에 강대봉의 동생인 강강자와 결혼식을 올렸으며, 1955년 8월에는 첫 딸인 김진주를 얻었다. 그러나 전축공장 등의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가 큰 실패를 맛보았고, 설상가상으로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었다. 1956년에 그는 늑골 절제수술을 받았으며, 한쪽 폐를 더 이상 쓸 수 없는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만 했다.

국산 라디오가 개발되기까지

1958년 가을에 김해수는 락희화학공업사(현재의 LG화학)가 새로 설립한 자회사인 금성사의 광고에 접하고 지원을 결심했다. <고급 기술 간부 모집>이라는 광고였다. 그때 몰려든 응모자들은 무려 2,000명에 달했는데, 최종 합격자는 김해수를 포함해서 3명이었다. 그 중 수석 합격자이자 실무경험이 가장 많은 김해수에게 금성 A-501호 라디오를 설계하는 책임이 맡겨졌다. A-501 중에 A는 교류(Alternating Current, AC)의 첫 글자에서 따왔고, 5는 5구식 진공관 라디오라는 의미였으며, 01은 제품 1호를 뜻했다.



<그림> 최초의 국산 라디오에 해당하는 금성 A-501호 라디오

오늘날 LG그룹의 모태가 된 락희화학은 1947년에 부산에서 설립되었다. 락희화학은 화장품 사업과 치약 사업에서의 잇따른 성공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학업체로 성장했다. 일명 ‘동동구리무’로 불린 럭키크림과 국내 최초의 튜브형 치약인 럭키치약은 전국 곳곳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구인회 사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화학제품을 넘어 전자제품으로 눈을 돌렸다.

구인회는 1957년에 금성합성수지공업사(1958년 11월에 금성사로 변경됨)를 설립하여 라디오 국산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미군 PX를 통해 산뜻한 외제 라디오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아무런 경험도 없는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윤욱현 기획부장을 비롯한 찬성론자들은 라디오 케이스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자체 기술로 감당할 부분이 적지 않으며, 핵심 기술은 외국에서 유치하면 된다고 맞섰다.

결국 1958년 4월에는 윤욱현을 주축으로 전자기기 생산공장 건립안이 마련되었고, 금성사는 라디오 국산화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라디오 생산을 위한 시설을 도입하기 위해 8만 5,195달러의 예산이 책정되었으며, 기술고문 겸 공장장으로는 독일인 기술자 헨케(H. W. Henke)가 선임되었다. 그런데 헨케는 기계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전기공학에 대해서는 기술적 한계를 드러냈고, 실무를 주도했던 김해수와 다툼을 벌이다 결국은 금성사를 떠나고 말았다.

국산 라디오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참고 모델로 삼은 것은 산요 라디오였다. 헨케가 주장한 독일제와 김해수가 제안한 일본제 중에서 후자가 선택된 것이었다. 금성사의 기술진은 산요 라디오를 분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라디오에 대한 기술을 익혔고, 필요한 경우에는 일본의 기술자들에게 접촉하여 관련 정보와 지식을 얻어냈다. 이처럼 후발 기업이나 후발국이 완성품을 출발점으로 삼아 기술을 학습하고 개발하는 방법은 ‘역행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으로 불린다. 마침내 김해수가 주축이 된 금성사 기술진은 1959년 8월에 국산 라디오 1호의 시제품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 금성 A-501은 1959년 11월 15일에 출시되었다. 그 해 생산량은 87대, 가격은 2만환이었다. A-501의 가격은 금성사 대졸 사원의 3달치 월급에 해당했지만,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외제 라디오에 비해서는 약 2/3에 불과했다. 당시에 김해수는 라디오 캐비닛에 대한 디자인은 물론 금성사의 상징인 왕관 모양의 샛별 마크와 ‘Gold Star’ 로고까지 창안하였다. 세부적인 디자인은 서울대 미대 회화과 졸업반이던 박용귀가 맡았는데, 그는 우리나라에서 공업디자인을 개척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라디오 보급의 길을 터준 박정희

금성사는 A-501에 이어 2~4개월의 간격을 두고 7종의 추가 모델을 잇달아 출시했다. A-401, B-401, A-502, A-503, TP-601, T-701, T-702이 그것이다. 그 중에 A-401은 A-501을 간소하게 만든 것이었고, TP 혹은 T는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라디오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들은 A-503을 제외하고는 모두 2~5개월 만에 단종되고 말았다. 제품의 성능이나 사양이 수입 라디오에 비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림> ≪동아일보≫ 1960년 11월 27일자에 실린 A-503에 대한 광고

국산 라디오를 생산하고 보급하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연관 산업의 기술수준이 워낙 취약한 탓에 부품의 불량이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다. 더구나 일본과 미국에서 유입된 밀수품이 범람하고 있어 국산 라디오에 대한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금성사 생산과장이던 김해수는 영업 업무까지 맡아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금성사의 라디오 공장에는 재고가 수북하게 쌓여만 갔다. 당시의 재고창고 안에는 반품으로 처리된 라디오 박스가 무려 2,000대나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금성사가 계속해서 적자를 기록하자 “락희화학이 번 돈을 금성가가 다 까먹는다.”는 여론도 생겨났다.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박정희였다. 1961년 가을에 부산 연지동의 금성사 라디오 공장은 거의 가동을 멈춘 상태였는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맡고 있던 박정희가 예고도 없이 공장을 방문했던 것이다. 김해수는 라디오 생산현황을 상세히 보고하면서 밀수품의 유통을 막아야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살아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

박정희의 라디오 공장 방문을 계기로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밀수품 근절에 관한 최고회의 포고령>을 선포했으며, 공보부 주관으로 전국의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전개한다는 발표가 잇따랐다. 그때부터 국산 라디오는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 농어촌에 라디오를 보급함으로써 군사정변에 대한 지지기반을 확대하고자 했던 박정희의 의도와 국산 라디오를 통해 한국의 전자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금성사의 요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던 셈이다.



<그림> 국산 라디오의 보급을 촉진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한국 전자산업의 기틀을 다지다

김해수는 1961년 하반기부터 금성사의 신규 사업으로 계획된 텔레비전의 개발과 생산을 책임지고 일본의 히다치와 기술제휴를 추진했다. 1963년에는 금성사가 본사와 공장을 연지동에서 온천동으로 옮겼는데, 김해수는 금성사 동래공장을 맡아 라디오, 선풍기, 텔레비전, 적산전력계, 전화교환기의 생산을 총괄했다. 그는 자신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1950년부터 1966년까지 17년 동안 부산에서 생활했다.

1967년에는 금성사가 본사를 서울로 이전했고, 김해수는 기획부장으로 승진하여 가족과 함께 상경했다. 그는 기획부의 하부 조직으로 약전과, 강전과, 통신과를 설치했다. 그 중 약전과는 경북 구미의 전자공장을 잉태한 모채가 되었고, 강전과는 금성산전의 기반이 되었으며, 통신과는 금성통신의 산파 역할을 담당했다.

김해수는 1969년에 삼화콘덴서로 자리를 옮겨 5년 동안 전무로 활동했다. 1974~1980년에는 몇몇 재일교포들과 함께 한국트랜스, 신한전자, 대한노블전자, 한국음향, 경인전자, 한국금석, 한륙전자, 한국다이와 등 8개의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1978년에 국무총리실 소속 ‘중화학공업 10개년 계획’ 수립팀의 민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79년에는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기틀을 닦아온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산업포장을 수상했다.

김해수는 1980년에 삼신정기공업사(이후에 MAGMA로 명칭 변경)를 창업하여 자신이 직접 발명한 자력정(磁力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마그마’라는 상표의 자석식 열쇠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비슷한 이름의 싸구려 제품들이 난립했다. 자금력은 점점 바닥을 드러냈고, 결국 1983년에는 회사의 문을 닫고 말았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목에서

1987년에 김해수는 전자부품과 기계시설에 대한 무역대리점인 신기상역을 개업했다. 과거의 경험과 인맥을 바탕으로 사업을 조금씩 키워가고 있을 무렵, 김해수는 딸 부부 덕분에 세무사찰을 받는 고초를 당했다. 김해수의 딸 김진주는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한 후 1982년에 노동운동가 박노해(본명 박기평)와 결혼했다. 그러던 중 1991년 봄에 박노해와 김진주는 소위 ‘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었고, 김진주는 4년 동안, 박노해는 7년 5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림> 1984년에 발간된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당시의 상황에 대해 김해수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 딸과 사위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나는 거실 한가운데 영광스럽게 걸어두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포장’을 거두어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기로 했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20세기 말에는 그 상장의 의미도 빛이 바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국 근대화의 주역’으로 산업현장에서 심혈을 바쳤던 우리 세대는 위대했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겪었던 고통을 강요하거나 외면해온 죄를 짓기도 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민주화의 주역’이라는 임무를 떠넘기게 됨으로써 우리 사회가 더욱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김해수는 말년에 신기상역을 막내아들에게 넘겨주고 자서전을 준비하다가 2005년 8월 21일에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2년 뒤에 김진주는 아버지의 원고를 정리하여 ≪아버지의 라디오≫를 세상에 선보였다.

<참고문헌>
금성사, ≪금성사 25년사≫ (1985).
서현진, ≪끝없는 혁명: 한국 전자산업 40년의 발자취≫ (이비컴, 2001).
김해수 지음, 김진주 엮음, ≪아버지의 라듸오: 국산 라디오 1호를 만든 엔지니어 이야기≫ (느린 걸음, 2007; 2016).
송성수, ≪사람의 역사, 기술의 역사≫ 제2판 (부산대학교출판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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