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 과학기술의 조건 송성수  (Homepage) 2008-11-13(목) 10:23:49, 3924

15년전인 1993년에 서울공대에서 발간하는 <공대저널>에 써 본 글입니다. ------------------------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일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보다 본질적인 문제제기에 직면하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적인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면서 얻게 되는 중요한 교훈은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문제의식이 역사적으로 변화해왔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 노예제도를 비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던가?  인간이 기계처럼 되는 비인간화를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가난하기 때문에 인간대접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편견은 얼마나 불식되었는가?    인간의 가치는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새롭게 인식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떠나서 미리 선험적으로 인간적 가치의 기준을 설정해 둘 수는 없다.  더구나 인간적 가치를 어떤 고정된 관념으로만 생각하게 될 경우, 오히려 비인간적인 행위를 범할 수도 있다.  ‘인간적 과학기술’을 관념적으로 주장하는 태도라든지 ‘과학기술의 가치중립성에 관한 신화(神話)’라는 것도 역사성을 무시한 고정관념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인간적 가치의 역사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선택 역시 역사적 관점을 통해서만 판단될 수 있음을 뜻한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의 가치선택을 어렵게 하며, 따라서 우리가 신중한 선택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적 과학기술을 관념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과학기술자의 선택이 인간적 가치에 부합되게 하는 것은 문제의 상황에 따라서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하이젠베르크(Werner K. Heisenberg)의 선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의 원자탄 제조를 책임 맡은 하이젠베르크는 히틀러가 그 무기를 먼저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했다.  당시에는 미국의 과학기술자들도 원자탄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원자탄 제조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만약 하이젠베르크가 거부를 했다면 자신의 신변이 위태로웠을 뿐만 아니라 하이젠베르크를 대신하여 다른 과학기술자가 원자탄 제조의 책임을 맡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에 대한 하이젠베르크의 전략은 히틀러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원자탄 제조를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었다.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의 조국인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하이젠베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에 미국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그 때 동료과학기술자들은 그가 독일로 귀국하는 것을 만류했지만 그는 조국으로 돌아가서 봉사할 것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독일의 패배를 감수하기로 한 그의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만일 히틀러가 원자탄을 먼저 사용할 수 있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이젠베르크의 선택은 나치 독일이 패배한 그 이후의 역사가 정당화해 주는 인간적인 선택이었다.    하이젠베르크가 그의 회고록 제목을 <부분과 전체>라고 한 것도 우리에게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준다.  왜냐하면 인간적 선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류 역사와 인류사회를 전체적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한된 대상영역 안에서의 진리탐구에 몰두해야 하는 과학기술자이기 때문에 넓은 사회와 역사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없다면, 그런 과학기술자는 결코 인간적 과학기술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적 과학기술은 과학기술인 한에서 부분적 진리를 추구할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인간적이기를 주장하는 한에서는 전체를 보는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적 과학기술의 기본조건은 사회와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고자 하는 과학기술자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적 과학기술의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자 한 사람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인간적이라는 사실이 저절로 한 사회의 과학기술이 인간화되는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원자탄 개발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작업의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차단된 상태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다.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과학기술자였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도 대부분은 하이젠베르크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주어진 문제를 열심히 풀이하는 과학기술자의 모습을 띠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이 높아만 보이는 구조적인 모순의 벽을 탓하면서 자신을 자위할 수만은 없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문제의 본질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이를 동료들과 함께 풀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가운데서 등장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공유되지 않는 문제의식은 공허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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