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기술관료, 정약용 송성수  (Homepage) 2010-06-02(수) 13:22:39, 4499

만약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 열명을 뽑아라는 여론 조사가 실시된다면, 다산 정약용은 반드시 포함될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정약용은 역사․정치․사회 등 많은 분야에 걸쳐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관리가 지켜야 할 길을 가르친 `목민심서`(牧民心書)와 이상적인 정부구조를 논한 `경세유표`(經世遺表)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정약용은 기술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각종 기술 진흥책을 제안하였다. 정약용은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6살 쯤에 그는 성호 이익의 글을 탐독하면서 실학에 심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서학과 천주교에 관심이 많았던 집안의 분위기도 한몫을 하였다. 정약용이 스스로 술회했듯이 당시의 젊은 학자들 사이에서는 “서양책을 읽는 것이 일대 유행”이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서양책이란 주로 중국에서 나온 책을 뜻하는 데 거기에는 오늘날의 기술에 해당하는 각종 문물에 대한 논의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정약용은 자신의 관료시절에 중요한 기술적 업적을 성취하였다. 그는 28세의 나이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면서 노량진에 주교(舟橋: 교량을 가설하기 어려운 큰 강에 많은 배들을 나란히 붙여 띄우고 그 위에 임시로 놓은 나무 다리)를 가설하는 공사에서 기획 및 설계를 담당하였다. 또한 그는 31세에 정조가 개혁의 본거지로 삼으려고 했던 화성(지금의 수원) 신도시 건설 사업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화성 건설 사업을 통하여 정약용은 거의 모든 기술적 문제들을 다루면서 각 조목마다 구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그는 축성의 재료를 선택하면서 당시의 기술 수준에서 가장 우수한 재료인 돌에 주목하였고, 채석을 규격화하여 수고와 경비를 덜고 성벽을 견고하게 하였으며, 성의 무너짐을 방지하고 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가 용이하도록 성의 구조를 3등분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기존의 기술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에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즉 그는 도로를 통해 물건을 실어나르는 유형거라는 수레를 개발하였고, 여러 개의 도르래를 사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적은 힘으로 들어 올리는 기중기를 고안하였다. 이러한 기술혁신에는 `기기도설`(奇器圖說)과 같은 중국 서적이 참고되었지만 정약용은 현실 여건에 맞게 원안을 과감하게 삭감하고 변형하여 활용하였다. 정약용의 기술에 대한 생각은 자신이 관료 시절에 집필했던 많은 경세론적 단편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기예론”(技藝論)으로서 그 글은 기술의 성격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집필로 평가된다. 그 글의 내용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뻔한 것이지만 유가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우선 정약용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삼강오륜과 같은 윤리에서 찾지 않고 기술의 습득과 활용에서 찾았다. 또한 그는 인간생활의 편리가 모두 성인의 덕택이라는 전통적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술이 대중들의 집단적 활동임을 강조하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견해에는 기존의 상고사상과 달리 기술이 장구한 세월에 걸쳐 축적되고 시대가 지날수록 발전한다는 진보사상도 엿보인다. 기술의 성격을 고찰한 후 정약용은 중국 기술의 즉각적인 도입을 강조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이미 새로운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데도 우리나라는 도입을 게을리하여 기술이 정체하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일본은 이미 중국의 선진 기술을 습득하여 부국강병해 있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그는 집권자들이 이미 망하고 없어진 명나라만 존중하고 청나라를 멸시할 것이 아니라 중국의 기술 중에서 우수한 것을 광범위하게 도입하고 익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에 기술도입과 개발을 전담하는 국가기관을 설립하자는 구상으로 이어졌다. 정약용은 1799년에 “도량형의”(度量衡議)와 “응지논농정소”(應旨論農政疏)를 집필하였다. 전자는 군포 징수 비리 사건을 계기로 도량형의 표준화에 대한 필요성, 기술적 방안, 제도적 대책을 제안한 것이었고, 후자는 정조가 농업의 발전을 위한 의견을 구했을 때 편농(便農: 농사를 편하게 지을 수 있는 대책), 후농(厚農: 농민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기 위한 대책), 상농(上農: 농민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대책)을 권고한 것이었다. 이러한 두 단편에는 백성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덜어 주려는 정약용의 위민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도량형이 표준화되지 않아서 백성이 탐관오리에게 “속임당할 실마리가 많음”을 걱정했고, “허리가 시큰하고 어깨가 아프며 흙탕에 더러워지고 거머리까지 달려드는” 모내기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앙마라는 농기구의 사용을 제창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때 그것의 제도적 정착을 보장하는 방안을 잊지 않았다. 공조와 감영에서만 도량형기를 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국가가 주관해서 농기구를 만들고 각 지방에서 시험한 후 사용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제안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상과 같은 정약용의 기술적 업적이나 기술적 제안은 1800년에 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신유박해로 정약용이 유배를 당함으로써 제대로 계승되거나 채택되지 못했다. 그러나 정약용의 기술에 대한 관심은 유배시절의 저술을 통해 끊임없이 표출되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의 “호전 육조”(戶典 六條)에서 각종 농기구를 개량하여 사용하고 농업을 곡물 생산, 과수 농업, 직물 제조, 원료 생산, 축산업의 6과(六科)로 전문화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공전 육조”(工典 六條)에서 작업의 효율적 분담, 적절한 공사 자재의 준비, 각종 기구의 활용, 작업의 체계적 관리 등을 강조하였다. 정약용의 기술진흥방안을 가장 분명하게 엿볼 수 있는 글은 `경세유표`의 “동관 공조”(冬官工曹)이다. 여기서 그는 ‘이용감’(利用監)이란 관청을 신설하여 기술을 도입․보급하고 기술자를 양성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용감은 오늘날로 치면 KIST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약용 이전에도 연암 박지원과 초정 박제가가 서양과 중국의 문물을 소개하면서 외국의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새로운 국가기관의 설치와 운용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사람은 정약용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다. 정약용은 이용감을 통해 도입해야 할 기술의 종류를 20여가지로 열거한 후에 이를 건축, 수레, 조선, 주조, 방직, 제지의 여섯 분야로 분류하였다. 또한 그는 이용감의 직제로서 차관급 1명, 국장급 2명, 과장급 4명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그 자격 요건으로 과학, 외국어, 손재주, 안목 등을 들었다. 그는 외국에서 도입한 기술을 이용감에서 시험한 후 각 분야의 전문관청으로 전달하고 필요한 백성에게 보급하는 3단계 방식을 취하면서, 각 기술 분야의 특성과 기술 수준의 현황을 감안하여 기술의 종류에 따라 기술도입 전략과 보급 방법을 달리하였다. `목민심서`나 `경세유표`에서 엿볼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점은 정약용의 기술자 육성 방안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기술자의 성적을 고과하여 우수한 자를 신분에 관계없이 관리로 등용하는 방안과 장인들을 한 곳에 모아 함께 살게 하면서 기술축적 능력을 제고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자신이 기술관료의 길을 걸어온 정약용은 기술에 대한 소양을 갖춘 사람을 이상적인 관료로 생각했고 그 재원으로 6과의 농업기술자와 이용감의 수공업기술자를 염두에 두었다. 이처럼 정약용의 기술개발전략에는 신분제도의 타파라는 사회개혁의 문제가 연결되어 있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정약용의 업적과 제안이 꾸준히 실현되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분명히 정약용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위대한 기술관료’라는 호칭이 결코 부자연스럽지 않다. 정약용은 기술을 매개로 이용후생, 부국강병, 위민사상 등을 실천하고 제안했던 우리 역사의 위대한 스승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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