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때 김영국  (Homepage) 2021-10-17(일) 19:56:20, 17179

나는 부자다.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상위 10% 부자다. 소형 아파트 한 채, 일인분의 연금, 고물차 한 대가 전부인 내가 재난 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사실 나는 코로나로 경제적 손실을 전혀 입지 않았다. 모임, 외식 따위의 경비가 줄어들었으니 통장의 잔고는 더 높아졌다. 그래서 나는, 공무원 등 일반 봉급생활자나 우리 같은 연금 생활자에게 나라에서 돈을 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하던 터라, 내가 제외된 것에 대해 불평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이른바 ‘텐 프로’에 속한다는 것은 좀 우습다. 생각해보면 나는 부자는 아니라도 가난하지도 않다. 몸 붙일 집이 있고, 사는 날까지 나오는 연금이 있고, 우리 내외 병원비 정도는 통장에 들어있다. 혹 좀 모자라면 자식들이 있지 않은가. 정말이지 이제 그렇게 애면글면 살 필요가 없다. 이제 허리띠 좀 풀고 넉넉하게 살아가도 괜찮은 처지가 됐다.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가고 싶은 데 가고, 쓰고 싶은 데 펑펑은 아니라도 좀 써도 된다. 생각은 이렇게 하는데 행동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때는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벗겨지지 않는다. 오랜 무명 생활 끝에 스타덤에 오른 가수에게 사회자가 물었다. “뜨고 나니 뭐가 달라졌어요?” “식당에서 메뉴판의 가격을 보지 않고 주문하게 된 게 신기해요.” 옆에 있던 동료 가수가 덧붙였다. “마음 놓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킬 수 있어 너무 좋았어요.” 그들은 넝마를 벗듯 가난의 때를 가볍게 씻어낸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메뉴판의 가격에 저절로 눈이 간다. 가격 신경 안 써도 되는 회식이나 모임에서는 음식 앞에서 나는 체통을 잃기 일쑤다. 밑반찬(쯔께다시)이 나오면 남 먼저 젓가락이 나간다. 아내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정말 없어 보인다고 지청구를 했지만 좀체 고쳐지지 않는다. 메인요리가 나오면 허겁지겁 덤빈다. 뱃속이 어느 정도 차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보며 챙기는 척 한다. 일어설 땐 매번 배 빵빵이다. 별식 앞에 앉으면 늘 배고팠던 내 내면의 아이가 나를 지배하고 만다. 일 년에 그런 음식 한두 번, 그것도 감질나게 맛만 보던 그 아이가 그런 상황에서 어찌 염치 따위를 차릴 수 있겠는가.(게걸스럽게 먹던 저의 모습 기억하고 계신 분~ 그건 제가 아니고 불쌍한 제 내면의 아이였습니다.ㅠㅠ) 비단 먹는 자리에서만 이 아이가 설치는 게 아니다. 시도 때도 없다. 종량제 봉투 하나가 얼마나 한다고 그 봉투를 여유 있게 묶은 적이 없다. 치약 그건 또 뭐라고 그렇게 애터지게 짜고 또 짜는지.(추수 끝난 논바닥에서 이삭을 줍고, 멍석 바깥으로 튀어나온 곡식 낟알 하나하나를 주워 담으며 이 아이는 자랐다.) 소변 보고 물 내리는 것 갖고도 망설인다. 같이 사는 사람의 눈총 때문에 내리긴 하지만 내릴 때마다 수돗물이 아깝다.(엄마가 옹기 물동이에 이고 온 물이 우리 일곱 식구의 식수이고 생활용수였다.) 백지 이면지를 차마 버릴 수 없어 대책 없이 쌓아가고 있다.(아버지에게 푼돈 받아 사 든 도화지 한 장의 눈부심과 무게를 이 아이는 잊지 못한다.) 이 아이는 오지랖도 넓어 바깥세상까지 간섭한다. 수도를 틀어놓고 양치하는 손주를 보면 즈그 엄마 아빠 있는데도 주제넘게 나서려고 덤빈다. 공중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휴지를 두 장 석 장 뽑아 쓰는 사람에겐 말은 못하고 혀만 찬다.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울고 있을 때 옆에 있는 친구가 화장지를 여러 장 쑥쑥 뽑아주는 것에도 눈살을 찌푸린다. 저 귀한 순백의 화장지를 저렇게 낭비하다니! 학교 교장 자리에 있을 때는 에어컨 때문에 학생들과 많이 싸웠다. 춥다고 체육복을 걸치고 있으면서, 창문은 있는 대로 다 열어놓고는 에어컨을 더 빵빵 틀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선풍기는커녕 부채도 없던 시절을 겪은 이 아이는 그들의 엄살과 경제관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영화 <라라랜드>에서 배우 지망생 엠마 스톤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유명 배우가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거기도 연예인 특전이 있었는지 그 배우에게 계산 안 해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 배우는 커피 값을 내고 거스름도 받지 않은 채 유유히 걸어나갔다. 오픈카에는 잘 생긴 남자가 그녀를 맞아주었다. 차가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영화 한 편이 대박을 치는 바람에 엠마 스톤도 드디어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는 그 휴게소에 찾아갔다. 알바가 스타를 알아보고 커피 값을 사양했다. 당당하게 커피 값을 내고 잔돈은 받지 않은 채 알바의 시선을 의식하며 밖으로 나갔다. 미남 배우 라이언 고슬링이 그때 그 오픈카에서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이제 국가가 인정하는 텐 프로가 되었다. 가난의 때를 말끔히 씻어내고, 내면의 아이를 잠재울 수 있는 퍼포먼스를 해야 할까 보다. 뭐가 좋을까. 아마 어떤 씻김굿으로도 이 때는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저 연예인들과 달리, 나의 때는 피부에 묻은 그냥 때가 아니다. 뜨거운 물에 불리고 불리어 이태리타올로 밀고 또 밀어도, 골수에까지 밴 이 가난의 때는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젊은 시절 누가 나 보고 그랬다. “니는 수돗물 먹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촌 때를 못 벗노?” 나는 본디 그런 사람인가 보다. 할 수 없다. 이번 생은 이렇게 살 수밖에. 쪽팔리지만 꾀죄죄한 이 모습으로 저승의 면접관 앞에 서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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