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를 허하라-이런 생각3 김영국  (Homepage) 2021-12-25(토) 08:54:03, 19511

나이 일흔을 넘기고 나니 나의 화두는 죽음이다. 이른바 웰빙도, 웰에이징도 그 정도면 과분했다. 이제 웰다잉만 남았다. 그러나 이건 내 노력이나 의지로 어찌 해볼 수가 없다. ‘구구팔팔이삼사’라고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아흔아홉까지 살 체력도 욕심도 없다. 다만 이삼일 앓다가 잠자듯 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욕망은 모든 늙은이의 로망이다. 그 로망으로 가는 길이 있다. 사전의료의향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전안락사의향서를 받아두는 것이다. 고생하지 않고, 고생시키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다. 어머니가 입원했던 병실의 두 어른이 생각난다. 한 분은 치매 환자였다. 이 할머니는 눈만 뜨면 있지도 않은 하인에게 야단을 치거나 욕을 하였다. 그런데 눈 뜨는 시간이 일정치 않으니 환우들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목소리도 쩌렁쩌렁했다. 직장 다니는 딸이 퇴근하는 길에 들르곤 했는데 올 때마다 과자나 과일을 사와서 한 방의 환자들에게 나눠주며 양해를 부탁했다. 죄인처럼 굽실거리는 딸도 안됐지만, TV도 못 보고 얘기도 나눌 수 없는 환우들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또 한 분은 뇌졸중으로 꼼짝 못하고 누워있기만 했다. 음식을 씹고 삼킬 수가 없어 식도에 관을 꽂아놓고 유동식을 삽입했다. 과년한 딸이 출퇴근하며 간호했다. 밤에는 간병인, 낮에는 딸의 보살핌에다 양질의 음식을 공급받은 영향인지 살이 오른 얼굴에 화색까지 감돌았다. 어머니가 암으로 입원했을 때 이미 입원 중이었던 두 분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에도 여전히 그 모습으로 살아계셨다. 영화 <투어 드 포스:기적의 여정>은 독일에서 벨기에까지 자전거로 여행하는 로드 무비다. 이 여행은 한 명이 정한 목적지로 가는 동안 팀원에게 각기 주어진 미션을 낄낄거리며 수행하는 연례행사다. 이번 여행의 리더는 주인공 한스다. 한스가 벨기에를 목적지로 잡은 이유는 그 나라는 조력자살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스는 루게릭 초기였다. 아버지가 루게릭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그 병원에서 한스는 아버지보다 진행이 훨씬 빠르다고 진단했다. 한스의 결심을 중도에서 알게 된 팀원들의 낙담이 컸으나 결국 한스가 바라는 대로 즐겁게 목적지까지 여행을 계속한다. 늦게 알고 뒤좇아 온 어머니 그리고 아내, 동생,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스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 편안하게 눈을 감는다. 미국의 한 간호원은 암에 걸린 남편이 안락사를 원했으나 거부하였다. 끝까지 남편 곁을 지키며 간호하였다. 남편은 온갖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고통 속에서 죽었다. 이번에는 혼자 남은 아내가 암에 걸렸다. 한눈에 희망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안락사를 결심하였다. 절친 두 사람을 불러 자기 결심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물었다. “다음 주 수요일이 좋겠니? 금요일이 좋겠니?” 마치 곗날 의논하듯 날짜를 정하고 그 두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그녀는 여행을 떠나듯 떠났다. 정말이지, 질척거리지 말고 깔끔하게 떠나고 싶다. 이제 일흔을 넘어 여든을 바라보고 있다. 살 만큼 살지 않았는가. 그리고 누릴 만큼 누렸다. 이제 언제든 때가 되면 선선히 떠날 각오가 돼 있다. 내 힘들지 않고, 가족 힘들게 하지 말고, 거기다 나랏돈 축내지 않고 조용히 떠나고 싶다. 나의 이 욕망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안락사의 길만 열어주면 수많은 늙은이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늙어가고, 편안하게 떠날 수 있는데 왜, 무슨 명분으로 주저하는가. 내 의사와 관계없이 태어났지만, 일정 나이가 되고 일정 상황이 되면 내 의사로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 언젠가 나라별 죽음지수가 발표된 것을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가 최하위권이었다. 상위권 나라에 비해 항암제 사용이 월등히 많았고, 마약성 진통제 사용이 적었다. 우리나라 노인 환자들이 그만큼 오래 오래 고생하다가 갔다는 것이다. 생전의 행복지수도 최하위권인데 죽음마저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안락사를 반대하는 것은 위선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환자 부모를 위하는 것인지 냉정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닌 말로 안락사만 허용되면 많은 문제가 덩달아 해결된다. 초고령사회 문제도 완화될 것이고, 가계부채도 줄어들 것이다. 건강보험재정도 호전될 것이고, 연금 고갈 사태도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런데 20대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의 공약을 눈비비고 살펴봐도 이 얘기는 없다. 표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목소리 큰 위선자들의 반발이 겁나는가 보다. 모르긴 해도 속마음은 그걸 바라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분명히 표가 된다. 과감하게 공약으로 내걸어라. 그가 공중부양한다는 허경영일지라도 나는 기꺼이 한 표를 던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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