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악기 김영국  (Homepage) 2022-05-23(월) 19:53:41, 30134

악기는 나의 로망이었다. 어릴 때는 하모니카를 불고 싶었다. 어쩌다 헌 하모니카가 내 손에 들어왔다. ‘해는 져어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두어 소절을 익히는 중에 망가지고 말았다. 기타를 치는 사람이 멋있어보였다. 어른이 되어서 덜컥 기타를 구입했다. 교본을 보고 연습하는데 늘지는 않고 손가락만 아팠다. 방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기타는 몇 번의 이사 와중에 없어지고 말았다. 퇴임을 앞두고 색소폰이 다가왔다. 배우기도 쉽고, 가격도 저렴할뿐더러 폐활량 유지에도 좋다며 유혹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얼마나 불 수 있겠는가 생각하니 시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악기 하나쯤은’ 하는 욕망은 다음 생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막연하기만 했던 다음 생이 금방 성큼 다가왔다. 그 문턱에서 기적처럼 돌아왔다. 정기 진료를 위해 동서울터미널에서 택시를 탔다. 아산병원까지는 30분 남짓 거리였다. 기사가 피골이 상접한 나의 몰골을 보더니 자신의 투병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양방 한방 좋다는 병원을 다 섭렵했으나 병명조차 알 수 없었다. 소화가 안 되고 입맛이 없고 기운이 날로 쇠잔해가던 중, 어떤 사람이 노래를 부르라고 하더란다. 그냥 남 눈치 보지 말고 목청껏 열 곡 스무 곡 부르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택시를 하면서 시간만 나면 테이프 노래를 따라 불렀다. 손님이 양해를 하면 손님 태우고도 노래를 불렀다. 어느 새 소화가 되고 입맛도 돌아오고 기운도 되살아났다. 지금은 약도 다 끊었다고 했다. 산책길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가사였다. 스마트폰 때문에 전화번호가 머리에서 지워졌듯, 노래방 때문에 가사를 잊어버린 것이다. 작은 노트를 마련하여 부르고 싶은 노래의 가사를 2절까지 적었다. 그리고 외웠다. 노트에 오른 노래의 목록이 늘어났다. 머릿속에도 노래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목포의 눈물’에서 ‘테스 형’까지, 트롯에서 발라드 그리고 민요까지 나의 노래는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경지가 되어갔다. 레파토리가 늘어나니 그날의 날씨나 계절에 따라, 그날의 기분에 따라 입맛대로 고를 수가 있게 되었다. 집을 나서면 저절로 콧노래가 나오기 시작하고, 그날의 노래가 자연스럽게 메들리로 이어진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나설 때보다 한결 몸이 가뿐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내 목청이 악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최첨단의 고성능 악기다. 연주자의 몸 상태, 마음 상태를 스스로 파악해서 그에 맞추어 박자, 멜로디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편곡 기능까지 갖추고 있는 악기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이런 연주자 맞춤형 악기는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오르막에선 박자가 느려지고, 사람이 다가오면 볼륨이 자동 조절된다. 비록 악기의 핵심 기능인 음색에는 문제가 많지만, 이 악기 연주의 청중은 연주자뿐이고, 연주 목적이 순전히 연주자 치유에 있으니 음색 따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본디 박치인데다 5~6 년을 멋대로 리메이크하여 혼자 부르고 다녔으니 아마도 노래방에 가면 형편없는 점수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노래방에 갈 일이 없으니 그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이 악기의 자랑은 한없이 편리하다는 것이다. ‘편리’라는 말을 하니 얄궂은 옛날 유머가 생각난다. 모유를 장려하던 때의 개그다. 우유에 대비한 모유의 장점을 나열하는 것이었다. ‘휴대가 편리하다. 보온이 필요 없다. 용기容器가 아름답다. 부자공용父子共用이다.’ 웃음의 포인트는 후반에 있지만 실질 내용은 전반부에 있다. 목청이라는 악기의 장점도 편리하다는 것이다. 악기 케이스를 들거나 메고 다니는 것이 있어 보이긴 해도 본인으로선 많이 불편할 것이다. 목청은 휴대가 편할 뿐 아니라 전문가의 조율도 필요 없다. 그리고 이 악기를 연주하는 데 손이나 활 따위의 도움이 필요 없다. 지가 알아서 혼자 다 조절할 수 있으니 세상에 이렇게 편리한 악기가 목청 말고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 악기는 연주자의 건강까지 챙겨준다. 걸으며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 폐활량이 늘어날 것이다. 가사와 멜로디를 외우고 익혀야 하니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괴테대학교 연구팀이 가창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서 90명의 합창단에게 60분 동안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리고 혈액 검사를 한바 면역항체가 증가했다. 그러나 듣기만 한 청중에게는 그러한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이나 부르고 난 뒤 기분이 좋아지니 세로토닌 등 이로운 신경전달물질도 많이 분비될 것이다. 노래 부르기로 난치병에서 벗어난 저 고마운 택시기사나, 매일 면역억제제를 먹으면서도 내가 감기나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과학적 근거를 찾은 셈이다. 게일 가젤은 <하버드 회복탄력성 수업>에서 회복탄력성 지수를 측정하는 16개의 문항을 제시했다. 그 중 내가 자신 있게 5점 만점을 준 항목이 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이 악기의 덕택이다.(미시간 대학교 제이슨R. 킬러의 실험에 따르면 소리내어 노래를 부르면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의 분비는 줄어둘고 행복 호르몬 옥시토신은 증가했다.) 늙어갈수록 개인의 모든 곳간은 비워지기 마련이다. 너무도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런데 나의 노래 곳간은 신곡으로 더 채워지고 있다. 그만큼 나는 덜 외롭고, 덜 우울하고, 덜 아플 수 있을 것이다. 하모니카도, 기타도, 색소폰도 배우는 데 실패했지만 늘그막에 목청이라는 악기를 발견하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목청은 나의 가장 효능 좋은 행복 도구가 되었다. 성악가 조수미는 몸이 악기라고 했다. 그래서 몸을 남 달리 아끼고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나의 악기 나의 목청에 삼가 경배하며 산다.              행복                           나태주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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