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사연이 있겠지' 김영국  (Homepage) 2022-05-09(월) 19:44:44, 29822

가장 똑똑한 사람이 누구일까.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 행복의 뜻부터 잡아보자. 행복은 ‘기분이 좋은 상태’ 내지 ‘기분이 나쁘지 않은 상태’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아지거나, 기분이 나빠지지 않을까. 일차적으로 외부의 나쁜 자극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면 된다. 추위나 더위로부터 행복을 지키기 위해 옷을 입고, 난방이나 냉방을 한다. 가시밭길이나 자갈길을 대비해 신발을 신는다. 이런 물리적 보호대에다 정신적 보호대까지 마련하면 행복의 깊이와 길이를 늘릴 수 있다.  신앙, 수행 등의 목적도 따지고 보면 행복을 지키는 수단일 것이다. 나도 나이가 들면서 내 나름의 보호 장치를 다듬어 장착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그럴 수 있지’(No.116)다. 젊어서 ‘그럴 수 있나’를 입에 달고 살았으나 늙어지니 자연스럽게 ‘그럴 수 있지’로 톤이 다운되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지적질하고 참견질하던 직업병을 내려놓고 그냥 내비 놔두자는 ‘내비도’(No.247)에 정진하고 있다. 한결 살기가 편해졌다. 오늘 얘기하는 ‘사연(사정)이 있겠지’도 그 장치의 하나다.   #1. 방콕 태국 방콕에서 겪었던 일이다. 방콕의 교통체증은 대단했다. 중형 관광버스의 에어컨은 신통치 않았다. 퇴근 시간이라 길은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조금 움직이는가 하면 다른 차가 우리 버스 앞에 끼어들었다. 우리 일행의 인내력도 한계에 다다라갔다. 그런데 힐끔 버스 기사의 표정을 보니 태평성대였다. 경적을 울리지도, 욕을 하지도 않았다. 가이드에게 물었다. “기사가 어찌 저리 태평해요? 저렇게 끼어드는데 화도 안 나나 봐요.” “여기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화를 안 내요. ‘무슨 사연이 있겠지.’ 생각해요.” 그러고 보니 시내버스의 기사도, 서 있는 승객들도 다 무사태평이었다. 짜증 가득한 우리 일행에 비하면 저들 태국인들은 모두 작은 부처님 같았다. “나무아미타불”이 아니라 “무슨 사연이 있겠지”를 되뇌는 보살 같았다. 태국을 ‘여유와 미소’의 나라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2. 주차장 직장 주차장에 차 한 대가 주차구역을 지키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누군가가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 것이다. 번호판을 확인한 직원들은 문제의 직원을 두고 말이 많았다. 그 친구 다시 봐야겠다는 상사도 있었고, 혼자 착한 척은 다하더니 드디어 본색이 드러났다고 수군거리는 동료도 있었다. 사무실은 잠시 그 직원 성토장이 된 듯했다. 그때 한 직원이 말했다. “무슨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요?  본인 얘기를 들어보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그때 그 직원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상황을 설명했다. “출장을 나갔다가 회의시간에 늦을 것 같아 부랴부랴 왔는데, 민원인들의 차로 주차장이 만차 상태였습니다. 마침 빈자리가 있어 다가갔더니 옆 차가 이미 주차선을 넘어와있었습니다. 그 빈 공간에 가까스로 주차를 하고 회의장에 갔습니다. 회의 마치고 다시 주차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깜빡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기 블랙박스 영상이 있습니다.” “...............” #3. 학교 내가 금정여고 근무할 때였다. 아침마다 지각하는 녀석이 있었다. 나는 지각에 특히 민감했다. 시간 지키기는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여학생에게 가혹했다. 여자가 늦잠을 자면 남편이 지각을 하고, 자식들이 지각을 하고, 나아가 우리나라가 지각을 한다는 개똥철학으로 열을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늦을 때마다 머리를 긁적이며 늦잠을 잤다고 했다. 공부를 잘하진 못해도 항상 생글거리며 ‘친한 척’하던 놈이었다. 야단을 치다가 나중에 가볍게 때리기도 했다. 이 녀석은 웃으며 도망가기도 하고 맞아도 금방 생글거렸다. 누가기록부를 보니 아버지가 회사 대표였다. 전화를 걸면 매번 할아버지가 받았다. 면목이 없다며 사과했다. 지도하는 나도 지쳐갔고, 녀석도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면서 나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원서를 쓸 때였다. 성장을 한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어머니를 보니 문득 야속한 생각이 떠올랐다. “어머니, 선희 지각 많이 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선생님, 저 선희 엄마 아입니더. 선희 이몹니더. 선생님 모르셨습니꺼?” 선희가 이모의 팔을 건들이며 제지했다. “작년에 형부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형부와 언니가 집을 나갔습니더. 선희가 할아버지와 남동생 돌보고 있습니더. 아침에 편찮은 할아버지 밥 차려드리고, 동생 도시락 싸서 보내고, 지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학교에 갔다 아입니꺼.” 이모가 눈물을 흘리자 선희도 눈물을 훔쳤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선희를 바라보았다. 바보같이 사과 아닌 원망을 했다. “가시나야, 그라모 말을 해야지.............” (선희야, 미안하다. 잘 살고 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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