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중도에 포기하지 말라는 속담이다. 과연 어느 정도 진실일까? 나무도 나무 나름이다. 도끼 나름이고, 찍는 사람 나름이다. 열 번이 아니라 백 번을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는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천지삐깔이다. 일생을 바쳐 넘어뜨려놓고 보니 그럴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나무일 수도 있다. 그렇게 한 번뿐인 짧은 인생 망친 사람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이 속담 정신으로 거목을 쓰러뜨려 만인의 귀감이 된 사람도 우리 주위에 또는 역사 속에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 마음먹고 덤볐는데, 찍다가 보니 이건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는 게 옳을까, 그래도 끝까지 가는 게 옳을까. ‘포기’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살짝 흔드는 얘기를 소개한다.
#1.
이석구 그림책작가의 한 페이지 만화 <함께 그리는 오늘>에 아버지와 어린 딸이 나온다. 딸의 거침없는 돌직구에 아빠가 한방 먹는 구성이다. ‘기적의 논리’에서도 아빠가 한 소식 듣는다.
놀고 있는 딸에게 아빠가 묻는다.
“아까,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끝냈어?”
“응!”
“다 한 거야?”
“아니, 포기했어.”
“그게 끝난 거야?”
“내가 안 하기로 했으면 끝난 거 아냐?“
“그.....그런가.”
#2
초등학교 수학 ‘무게’ 수업을 야외에서 하던 중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선생님, 저 바위 데게 무겁겠죠?”
“안 들면 안 무거워.”
“?????”
#3
박찬욱 영화감독의 가훈
‘아니면 말고’
#4
얼마 전 프로축구 천안시티FC 골키퍼 임민혁의 은퇴 선언이 화제가 되었다. 거의 무명에 가까운 선수의 은퇴 자체는 기삿거리가 될 수 없었다. 은퇴를 하면서 SNS에 올린 글이 예사롭지 않았다. 문장력이 놀라웠다. 운동선수들의 학교생활을 아는지라 더욱 그랬다. 글에 담긴 생각의 내공도 깊었다. 무엇보다 ‘포기’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 신선했다. 이런 사람이라면 축구선수 인생보다 훨씬 빛나는 ‘새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부를 소개한다. ‘K리그가 개막하는 오늘, 저는 프로 아마 총18년 동안 이어온 축구선수의 삶을 폐막하려 합니다.
서른 즈음 되면 대충 압니다. 세상에는 간절히 원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요. 포기하지 않고 끝내 쟁취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훌륭함만이 삶의 정답은 아니기에 한 치의 미련 없이 떠납니다. -중략- 적어도 추한 선배는 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약속 하나는 지키고 그만두는 것 같아 다행이기도 합니다. 저는 더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면서 새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3월 1일. 새로 시작하기에 날짜도 딱 좋네요. 여기저기 축하 만세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모두들 감사했고, 잘 머물다 갑니다.‘
고3 담임 때, ‘포기’는 배추를 세는 단위일 뿐이라며 쳐져가는 학생들을 부추겼다. 처칠이 옥스퍼드 졸업연설에서 했다는 ‘Never give up!'을 처칠을 흉내 내어 반복하여 외치기도 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여든을 목전에 둔 지금은 ’포기‘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나는 살아오면서 어떤 나무 앞에 비장하게 도끼를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리 더듬어보아도 열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도 찍어본 기억을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보지 마라.‘는 속담을 더 많이 들으며 자랐고,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알아서 기며 살아왔다. 버거워 보이면 부모님 가르침대로 아예 쳐다도보지 않고 발끝만 내려 보며 살아왔다. 참 한심한 인생이다. 그러나 그 한심한 인생이 짜드라 부끄럽지도 않고 짜드라 후회도 되지 않는다.
나는 우리 손주들이 악착같이 아등바등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백절불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생즉사 사즉생’ 등의 구호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일편단심 한 우물만 파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몇 번 찍어보고 이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싶으면 물러날 줄 알고, 우물을 파다가 잘못 짚었다 정말 잘못 짚었다 싶으면 플랜B를 생각하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시작했으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그런 결기로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능력 밖이다 싶으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매몰비용 따위 계산하지 말고, 남 눈치 살피지 말고 선선히 물러나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걸로 쪽팔려하지 말고, 자기 비난도 하지 않고 덤덤히 넘겼으면 좋겠다. 지혜롭게 결정하고 용기 있게 실행하면 포기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포기가 행복의 열쇠가 될 수도 있음을 알고 살았으면 좋겠다.
2024-04-04(목) 07: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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