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학문의 역사에 관한 단상 송성수  (Homepage) 2016-09-22(목) 11:12:40, 9856

위 사진을 클릭하면 국제신문 기사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학문의 역사에 관한 단상 송성수(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 과학기술학) 오늘날 학문은 몇 개가 있을까? 하나의 학문에 하나의 학과가 대응된다고 하면, 학문의 개수는 대략 100개가 될 것이다. 요즘에는 한 학과에도 무척 다양한 전공을 가진 교수들이 존재하므로, 교수 1명에 하나의 학문을 대응시키면 학문의 개수는 1,000개 이상으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렇게 많은 학문이 존재하게 되었을까? 필로소피(philosophy)와 아트(art)에 관한 얘기로 시작해 보자. 박사를 뜻하는 영어 약칭은 PhD이다. 그것은 Doctor of Philosophy의 줄임말인데, 이를 무식하게(?) 번역하면 ‘철학의 의사’가 된다. 이러한 문제점은 해당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해결할 수 있다. 필로소피는 그리스어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닥터는 라틴어의 도세르(docere)에서 유래한 것으로 ‘가르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박사는 어떤 학문 분야에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에 해당한다. 이제 아트로 가 보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Life is short, Art is long).”라는 명언이 있다. 이 말을 남긴 사람은 기원전 5세기의 의사인 히포크라테스이다. 의사가 예술을 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히포크라테스가 아트라고 한 것은 예술이 아니라 의술이었다. 의사로서의 내 인생은 짧지만, 내가 평생을 탐구해 온 의술은 영원하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맥락을 고려한다면 “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다.”고 번역하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필로소피와 아트는 학문의 역사에 대한 두 개의 키워드에 해당한다. 옛날에는 필로소피가 철학이 아니라 학문 전반을 의미했고, 아트는 예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의술, 기술, 예술 등을 포함했다. 이러한 상황을 살리려면 필로소피는 ‘학(學)’, 아트는 ‘술(術)’로 번역하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그리고 필로소피를 하는 사람은 학자(philosopher), 아트를 하는 사람은 장인(artisan)라 칭할 수 있다. 학문의 역사에는 학자적 전통과 장인적 전통이 녹아 있는 것이다. 학문의 전당으로 불리는 대학은 중세에 등장했다. 중세 대학에는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 등 3개의 고급학부와 모든 학생들이 공통으로 이수하는 교양학부가 있었다. 고급학부 중에서 신학과 법학은 기존의 학자적 전통이 당시의 사회적 필요를 수용한 것에 해당하고, 의학은 장인적 전통에서 출발한 후 학문의 대열에 합류한 것에 해당한다. 교양학부는 주로 수사, 문법, 논리 등의 3학과 산수, 기하, 천문, 음악 등의 4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늘날 식으로 해석하면 의사소통과 과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교양으로 간주되었던 셈이다. 근대 사회에 접어들면서 학문 전반을 의미하는 필로소피는 전문화 혹은 분화의 길을 밟았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인간에 관한 학문을 표방한 ‘인문학(humanities)’이란 용어가 빈번히 사용되었고, 문학과 역사학이 성행하는 가운데 철학은 형이상학 위주에서 인식론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자연현상을 다루는 학문인 과학은 17세기를 전후하여 정착되기 시작했는데, 과학(科學)은 필로소피로부터 독립한 ‘분과학문’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어 18세기에는 사회학, 경제학 등이, 19세기에는 인류학, 심리학 등이, 20세기에는 경영학, 행정학 등이 속속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과학은 18세기 이후에 화학, 지질학, 물리학, 생물학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필로소피의 분화와 함께 이루어진 것은 술에 속한 분야가 학으로 합류했다는 점이다. 중세 이후에는 의술이 의학으로 변모하는 가운데 아트는 기술과 예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세기에는 선진국의 산업화가 전개되면서 기술에 대한 학문인 공학이 탄생했으며, 그 후 아트에는 예술만 남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아트는 술에서 기예(技藝)로, 그리고 지금은 예술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공학은 20세기에 들어와 토목공학, 전기공학, 화학공학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이런 식으로 학문은 계속해서 분화되는 양상을 보이다가 20세기에 들어서는 복수의 학문이 연결된 학제적 분야(interdiscipline)가 등장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물리화학, 생화학, 생물물리학 등과 같이 과학 내부의 학제적 분야도 생겨났고, 과학사, 과학철학, 인지과학 등과 같이 과학과 인문학을 결합한 분야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급기야 최근에는 통섭(consilience)이 화두가 되면서 학문의 대통합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학문은 분화, 이동, 교차 등의 다양한 양상을 보이면서 진화해 왔다. 그것은 학문이 고정된 형태와 기능을 가지고 있는 실체가 아니라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존재라는 점을 시사한다. 어떤 학문이 과거에 수행했던 역할이 현재에 반드시 유효하지는 않으며, 현재의 학문적 지위가 미래에 계속 보장되지도 않는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학문의 구체적인 분야보다는 학문을 한다는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다 다양한 관심을 가지고 폭넓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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