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스파링파트너 김영국  (Homepage) 2021-11-25(목) 19:57:44, 18198

싫은 사람이 있다. 싫기까지는 아니라도 불편한 사람이 있다. 싫은 정도가 아니라 미운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피하는 것이 상수다. 그러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다. 이런 사람이나 문제를 만나면 두 가지 길이 있다. Flight or Fight! 도망갈 길이 없으면 맞설 수밖에 없다. 맞서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 상대를 스파링파트너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복싱 선수가 줄넘기, 샌드백 치기, 펀치볼 때리기만 하다가 링에 오를 수는 없다. 실전처럼 싸워줄 연습상대가 있어야 한다. 그를 두고 스파링파트너라 한다. 그 파트너가 너무 쉬워서는 기량이 늘지 않는다. 나의 약점을 파고들어 나를 괴롭힐 수 있어야 그 약점을 보완하게 되고, 맷집을 키우게 된다. 수업 듣고 혼자 문제집 풀다가 수능 치러가는 수험생은 없다. 모의고사가 수험생에게 스파링파트너다. 난이도나 문제유형이 수능의 그것과 비슷한 모의고사로 단련된 수험생은 실전을 연습처럼 편안히 시험을 칠 수 있다. 히말라야에서 수행하던 한 티벳 스님 이야기다. 산 속에 들어간 스님이 가끔 속세로 내려왔다. 그런데 수행을 했다는 스님의 행동이 개차반이었다. 가게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시비를 걸기도 하고, 심지어는 애기가 먹고 있는 과자를 뺏어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훌쩍 산 속으로 들어갔다가 또 어느 날 나타나곤 했다. 그의 행동에 변화는 없었다. 야단을 치거나 치도곤을 해도 실실 웃거나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어느 날 유명한 학자가 이 마을을 지나가다가 스님과 한 방에서 묵게 되었다. 학자는 대번에 스님의 내공을 알아보았다.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물었다. 스님은 자신의 수행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산 속에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속세로 내려와 주민들과 부딪쳐본다는 것이다. 스파링파트너의 공격을 유도해 자신의 맷집이 어느 정도 단련되었는지 모의고사를 쳐본다고 했다. 우리나라 스님들도 면벽이 끝나면 속세로 내려 보내 모의고사를 치게 하는 제도가 있다고 들었다. 어떤 스님은 차라리 속세가 수행하기에 좋은 곳이라 했다. 구석구석에 스파링파트너가 숨어 있다가 수행자를 단련시켜주기 때문이란다. 내 인생의 스파링파트너는 누구였을까. 어린 시절은 아버지였다. 늘 무섭고 힘들었다. 무슨 일을 하다가도 아버지가 보면 주눅이 들어 더듬거렸다. 사실 내가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꼴을 베러 가도 망태 빵빵하게 채우지 못했고, 갈비(솔가리의 방언)를 긁어서 지고 오면 내 짐이 가장 엉성했다. 벼 벨 때 낫질도 어설프고, 볏단을 묶어도 내가 한 것은 가려낼 수 있을 정도로 야무지지 못했다. 아버지의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결국 그 벽을 넘지 못하고 도시로 도망쳐 선생질을 하며 밥을 벌어먹었다. 아버지가 ‘너는 농사짓지 말라’고 내쫓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현명한 진로지도였다. 어른이 되어서 내 스파링파트너는 아내다. 아내의 잔소리다. 나는 애주가였다. 특별한 반찬이 있으면 키핑(?)해둔 소주병을 꺼내거나 막걸리를 사와서 혼술할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그런데 밖에서 마시다 보면 과음하기 일쑤였다. 뒷날의 후유증보다 더 힘든 아내의 잔소리 때문에 횟수를 줄였다. 수술 후 의사는 아내가 있는 자리에서 금주령을 내렸다. 이제 5년을 넘겼는데 한두 잔은 괜찮을 법한데 아내는 술의 시옷도 못 꺼내게 한다. 아내는 깔끔주의자다. 대충주의자인 내가 시달릴 수밖에 없다. 한 번쯤 어느 부위는 빠뜨릴 수도 있으련만 귀신같이 알아내어 씻으라고 야단이다. 잔소리가 귀찮아서 차라리 씻고 만다. 건강 잡학 박사급인 아내는 나의 음식, 운동, 건강식품 하나하나를 관장한다. 나는 아바타가 돼가고 있다. ‘이 나이에 대체 이게.......’하고 한탄하다가도 그분의 가혹한 스파링이 있었기에 천생약골인 내가 이 나이까지 숨을 쉬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달랜다. 그리고 속으로 고마워하고 있다. 속으로만^^ 직장에서 스파링파트너는 학생들이었다. 교실에 질문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때는 수업 중에 툭툭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복도에 따라 나와 묻기도 하고, 교무실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가끔 불순한 의도로 질문을 하는 녀석도 있었다. 나는 서여중에서 5월 어느 날 부산고등학교로 스카웃(?)되었다. 교무실에서 내가 최연소였다. 학생들은 이제 막 여중에서 올라온 새파란 선생이 못 미더웠을 것이다. 그래서 짓궂은 질문으로 나를 달아보거나 당황하는 나를 즐기는 놈도 있었다. 특히 7반의 형석이가 고약했다. 그 녀석들 때문에 공부 많이 했다. 꼴통 학생도 내 스파링파트너였다. 담배 골초, 지각 대장, 학급 평균 잠식자 들이 나를 괴롭혔다. 체벌이 횡행하던 때라 내게 많이도 맞았다. 그래도 이들이 있어 내가 인간으로서 교육자로서 많이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펩시콜라를 기사회생시킨 인드라 누이는 처음부터 코카콜라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천적이 아니라 공생해야 할 스파링파트너로 생각하며 경영에 임했다고 회고했다. 아직 브랜드 가치는 떨어지지만 전체 매출이나 이익 면에서는 파트너를 이미 추월했다. 오늘의 삼성을 있게 한 장본인은 이병철, 이건희 부자이겠지만, 스파링파트너 LG가 없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지금 후회되는 것은 좀 더 일찍 스파링파트너의 의미를 못 깨친 것이다. 이걸 그때 알았다면 스트레스를 훨씬 덜 받았을 것이고,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파트너를 훨씬 덜 미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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