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열쇠15 - 감동력 김영국  (Homepage) 2023-12-05(화) 08:33:04, 67259

현자란 모든 것에 감동하는 사람이다.                           - 앙드레 지드 올해 불꽃놀이는 막내손주(초3, 초5)와 함께 보았다. 해마다 보는 것이라, ‘이걸 매년 해야 하나?’ 할 정도가 되었다. 손주 둘만 보게 할 수는 없어 의자를 끌고 와 편하게 앉았다. 한 시간을 리액션하며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좀 난감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거실 창에 바싹 붙어 앉은 손주들은 한 방 한 방이 터질 때마다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별로 달라진 건 없는데 서서히 나도 달아오르기 시작하더니 그들의 환호작약에 빠져들었다. 불꽃놀이 초창기에 현장에서 본 이래 가장 화려한 불꽃놀이로 기억될 것이다. 손주들의 감동, 손주들의 행복이 고스란히 내게로 전염된 것이었다. 이들은 할아버지가 사주는 돈까스를 먹으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할머니가 만들어준 오무라이스에 엄지를 치켜든다.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다. 감동의 천재들이다. 올 가을에 북항 엑스포 예정지를 세 번이나 걸었다. 부산역의 구름다리에서 출발하여 공원을 거쳐 롯데백화점 뒷길을 돌아 자갈치까지, 나에겐 좀 버거운 길이다. 맛있는 음식, 새로운 경치를 접하면 생각나는 사람, 그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먼저 아내랑 가고 다음엔 친구와 갔다. 같은 길을 가는데 사람마다 반응이 달랐다. 한 친구는 구름다리를 걸으면서부터 찬탄의 연속이었다. 그 친구의 가장 큰 감탄 “와, 우리 마누라 한번 데려와야겠네!”가 금방 터져 나왔다. 그런데 다른 친구는 길이나 경관에 대한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부산항대교, 그 너머 근대사의 한이 서린 현해탄도 보이지 않는지, 이울어가는 억새 더미도 암시롱치 않은지, 아기자기 꾸며놓은 예쁜 다리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도통 반응이 없었다. “엑스포가 그리 대단한기가?”, “오페라 하우스가 가당키나 하나?” 등 객쩍은 소리가 전부였다. 이 친구, 예전엔 안 그랬는데 많이 건조해져 있었다. 늙는다는 건 건조해진다는 거라던데 마음 한 구석이 시렸다. 늘그막에 <빨강머리 앤>을 읽었다. 도서관 ‘큰 글자 책’ 코너에 그 책이 눈에 들어왔다. 큰 글자 책은 침대 위에서 읽는다. 우리 애들 어린 시절 TV 드라마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그때 초등학생들 사이에 ‘낭만적’이란 말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누워서 들고 읽기가 힘들 정도로 두꺼웠다. 재미없으면 관둬야지 했는데 시작부터 흥미진진했다. 너무 재미있어서 아껴 읽을 정도였다. 앤이라는 애가 너무 좋았다. 막내손주 서진이, 서윤이가 투영되어 더욱 귀여웠나 보다. 앤은 천재다. 수다의 천재, 실수의 천재, 상상력의 천재 그리고 감동의 천재였다. 특히 보이고 들리는 것마다에 감동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고사리, 제비꽃에서부터 가문비나무, 자작나무 그리고 호수, 길, 하늘의 놀이나 구름까지 그가 감동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매슈 아저씨, 마릴라 아주머니, 친구 다이애나, 선생님, 젊은 목사 부부, 이웃집 아주머니들의 작은 호의 하나하나에 앤은 감동했다. 주근깨에 빼빼 마른 체구, 게다가 빨강머리까지, 예쁜 구석 하나 없는 고아 소녀 앤이었지만, 그가 내뿜는 행복 바이러스에 주위의 모든 사람이 다 감염되었다. 시공을 넘어 나까지도 감염되고 말았다. 누군가 감동도 능력이라고 했다. 당연하다. 능력 중에서 최고의 능력이다. 행복으로 인도하는 가장 확실한 마스터 키가 감동력이기 때문이다. 감동할 때 분비되는 다이돌핀은 그 효과가 엔돌핀의 4000배로 밝혀졌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감동하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이유다.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말했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는 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새롭게 보고, 새롭게 듣고, 새롭게 느껴야 감동한다. 익숙해지면 편안하다. 편안해지는 대신 지루해지고 감동이 없어진다. ‘낯설게 하기’는 사람들이 익숙해진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하는 기법이다. 이 기법으로 예술가는 일반대중으로 하여금 세상을 다시 보게 하고 다시 보는 눈을 가지게 한다. 헬렌 켈러는 자기가 만약 대학총장이 된다면 ‘눈 사용법’이라는 강좌를 개설하겠다고 했다. 그런 강좌가 있다면 그 핵심은 아마 우리 눈에 끼인 세월의 때를 벗겨 내고, 우리 손주 서진이 서윤이의 눈, 빨강머리 앤의 눈을 되찾게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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