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누가 만들었을까 - 이런 생각12 김영국  (Homepage) 2023-12-22(금) 11:30:05, 66489

과연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을까. 실록에 그렇게 기록돼 있고, 해례본 첫머리에 ‘세종어제 훈민정음’이라 돼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온 국민이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런데 훈민정음이 나오기 8년 전에 훈민정음으로 언해(번역)된 불경(원각선종석보)이 발견되고, 그 번역 주체가 신미대사로 밝혀지자 청천벽력 같은 가설이 등장하였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아니라 신미대사가 만들었다.’ 불교계가 쌍수를 들고 이에 동조하였고, 작가 정찬주는 <천강에 비친 달>이라는 소설로 신미대사를 창제자로 추켜세웠다. 문제의 불경이 위작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학계에서 호응이 없자 찻잔 속의 태풍으로 가라앉던 중, 조철현 감독이 <나랏말싸미>라는 영화를 만들어 잦아드는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송강호, 박해일, 전미선 등 호화 캐스팅으로 흥행을 기대했으나 관객은 100만을 넘기지 못했고, 감독은 배터지게 욕만 먹었다. 타종교의 질시도 있었지만 일반대중도 천지개벽 같은 내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기존의 주장도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국사에 여념이 없는 한 나라의 임금이 어느 시간에 그 어려운 일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실록 어느 구석에도 세종대왕이 남모르게 그렇게 큰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무엇보다 세종대왕에겐 뜻글자 한자와는 전혀 다른 소리글자를 창제할 만한 배경 지식도 없었고, 그것을 공부할 여건도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공부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집현전 학사들도 마찬가지다. 한자밖에 모르던 그들에게 우리말을 담아낼 소리글자를 저렇게 정교하게 만들어낼 생각과 능력이 있었을 리 없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읽어보면 몇몇 문외한이 모여 비밀리에 틈틈이 해낼 프로젝트가 아니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를테면 ‘ㄱ’의 소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ㄱ은 어금닛소리니 ‘군君’자의 초성과 같다.‘ 그리고 그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설명한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본떴다.’ 놀라운 점은 또 있다. 음소 단위로 만들었으면서 음절 단위로 적게 한 것, 종성(받침)을 따로 만들지 않고 초성을 다시 쓰게 한 것(終聲復用初聲) 등은 오늘의 눈으로도 경이로울 지경이다. 이건 전문적 지식을 가진 비범한 개인을 상정하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신미대사(1403-1480)의 속명은 김수성, 김훈의 장남이자 집현전 학사 김수온의 친형이다. 아버지가 정적의 모함을 입어 불충불효의 죄로 형벌을 받자 집현전을 떠나 출가를 한다. 스승을 따라 불경을 해독하는 중 번역에 문제가 많음을 알고 산스크리트어 등 외국어를 공부하였다. 안평대군, 수양대군의 주선으로 세종대왕을 만나게 되고 훈민정음 창제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법주사(이 사찰 아래에 신미대사 공원이 조성되었다.) 등 사찰을 전전하면서 극비리에(꼰대 선비들이 눈치챌까봐) 이 일을 추진하였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만들고 신미대사가 자문을 하였는지, 신미대사가 만들고 세종대왕이 감수를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나는 후자가 합리적 추론이라고 생각한다. 신미대사가 주축이 되어 만들었다 할지라도 당시 사회(숭유억불) 분위기로 보아 그걸 드러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숨겼는데도 최만리를 비롯한 선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반대했는데, 일개 승려가 임금의 밀명을 받아 한 일이라는 게 알려졌다면 요즘 말로 탄핵하자고 덤볐을 것이다. 신미의 작품일 거라는 방증은 많다. 세종대왕이 문종에게 유언으로 지시한 신미의 존호는 어마어마하다. 나중에 선비들의 반대로 많이 격하됐지만 주목할 부분은 ‘우국이세’ 佑國利世다.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하다. 일개 승려에게 가당치도 않다는 여론에 문종도 굴복했다. 또 하나의 방증은 유교 시대에 훈민정음으로 논어나 맹자를 번역하지 않고, 불경부터 손을 댄 것이다. 또 그는 최초로 훈민정음으로 상소문을 올려 감금까지 된 사람이다.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훈민정음 창제자는 누가 되는가. 창제와 창제 방침을 지시하고 최종 감수한 세종대왕일까, 아니면 실무책임자로서 훈민정음 글자를 만든 신미대사일까. 문득 조영남의 대작代作 사건이 떠오른다. 점당 10만원을 받고 그린 화투 그림은 조영남의 작품인가, 대리작가 송모의 작품인가. 그 그림을 조영남의 작품으로 알고 고가로 구입한 구매자가 조영남을 사기죄로 고소했다. 최종심에서 조영남은 무죄로 확정되었다. 조영남의 아이디어인 만큼 조영남의 작품이 맞다는 것이다.(개념미술에서는 아이디어가 중요하다나.) 세종대왕이 신미를 만났을 때 적어도 백성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소리글자를 만들라는 정도의 취지와 방침은 하달했을 것이다. 저 판결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의 작품이 된다. 그러면 세종대에 만들어진 측우기 등은 세종대왕의 작품인가, 장영실의 작품인가. 지도교수가 지시한 주제로 대학원생이 쓴 논문은 지도교수의 것인가, 대학원생의 것인가. 헷갈린다. 세종대왕이 창제자라면, 실제로 글자를 만든 신미대사는 뭐라고 규정해야 할까. 그냥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없었던 일로 덮어버리는 것이 온당한가. 당시 사정으로 진실을 밝힐 수 없었던 세종대왕은 임종을 앞두고,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존호 32자를 신미에게 내리라고 문종에게 유시했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그렇게 담아낸 것이리라. ‘선교종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 세종대왕이 신미를 가린 것은 당신이 창제의 공을 독점하려는 뜻이 아니었다고 본다. 그렇게 하는 것이 훈민정음을 세상에 펼치는 데 저항을 줄일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신미대사를 이대로 덮어두는 것은 신미대사에 대한 도리가 아닐뿐더러 세종대왕의 속뜻에 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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