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제자의 겨울 편지 김영국  (Homepage) 2024-01-01(월) 08:29:54, 64683

지난 동지 무렵이 올 겨울 최고의 추위였다. 그런데 나는 그 추위를 훈훈하게 견딜 수 있었다. 뜻밖의 옛 제자로부터 받은 겨울 편지 덕택이다. 83년 문현여고를 졸업한 1회 졸업생이라니 꼭 40 년 전의 제자다. 40 년이라니. 고3이 열아홉이니 이제 쉰아홉? 그때 걔들이 벌써 환갑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그러나 편지 속의 목소리는 영락없는 여고생의 그것이었다. 혹시나 하고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교육사랑의 내 글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순간은 그날의 호들갑(?)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를 기억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편지에서 기억의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세세하게 나열했으나 내 머릿속은 그냥 하얀 백지 그대로였다. 글 쓴 애는 시내 백일장을 휩쓸어 조회대에서 몇 번이나 낭독하였고, 무려 ㅇㅇ대 영문과를 갔다는데...... 나머지 두 명은 2학년 때 내 반이었고, 상당히 인상적인 추억담도 있었으나 역시 감감했다. 이럴 수가 있을까. 망각이 축복이라고 늘그막에 떠들어댔는데 바지런하고 성능 좋은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못내 원망스러웠다. 누가 알은체를 하며 다가와 손을 잡았으나 도통 알 수 없을 때의 난감함의 몇십 배 더 민망했다. 그러고 보니 밤하늘의 기라성처럼 빛나던 ‘반짝이’들도 말끔히 리셋돼 있었다.(위로가 좀 되려나ㅠㅠ) 그들을 상기해내느라 떠올린 문현여고 시절이 40 년이 지났는데도 나를 따뜻이 데펴주었다. 그 시절은 내 교직 40 년의 화양연화였다. 황령산 기슭의 신설 문현여고는 황량했다. 그러나 교실은 꽃밭이었다. 남학교와는 딴판이었다. 수업이 즐거웠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 초롱초롱한 눈빛, 즉각적인 반응, 까르르 숨넘어가는 웃음소리....... 내가 명강을 하고 있고, 내 유머 감각이 특출한 줄 착각하며 살았다.(열강은 했다.^^)  대외 모의고사 성적은 군계일학이었고 학부모들도 금방 학교를 신뢰했다. 선생님들은 신이 났고 교무실 분위기도 더할 나위 없었다. 테니스에 빠졌고 퇴근하며 나누는 소주도 달았다. 나를 순식간에 30대 후반으로 데려다 준 따뜻한 타임머신 ‘겨울 편지’를 소개한다. 그들과 나를 이어준 ‘교육사랑’에도 감사를 드린다. 언젠가는 호주의 제자도 만나게 해주었다. O희야 고맙다. 행복해라♡♡♡ 교육사랑이여 영원하라!!! <뱀발> 선생님은 까맣게 잊었어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기억의 파편들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동창끼리 모인 자리에서 특정 선생님이 도마에 오르면 그 파편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두 번째 편지에 언급된 에피소드들, 비록 거긴 듣기 좋은 것들이었지만 어찌 그 반대쪽은 없었으랴. 고맙기도 하고 한편 또 두렵기도 했다. 후배님들, 혹 이 글 읽으신다면 부디 타산지석으로 삼으시길....             **************************************** 오래 전 제자가 메일 드립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1983년에서 1985년, 황량한 운동장을 지녔던 신설 문현여고, 그때 선생님은 저희의 국어 선생님이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담임 학생도 아니었기에... 아마도 한참 동안, 묵혀 두었던 기억의 책갈피를 넘기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O희...라고 혹시라도 기억하시는지요? 더불어 1984년 고2 담임 학생이었던 오O현, 홍O희 학생도 떠올릴 수 있으신지요? 수많은 학생들과의 만남과 이별이 선생님의 일상이시니, 이 이름들이 찾기 힘든 어느 모퉁이로 숨어버린 것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셔도 완전히 아줌마가 된 어떤 옛 제자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시고 편안하게 읽어주시면, 저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희 셋은 요즘 애들 말로 절친이고, 5명이 있는 단체톡방(다섯 명 모두 국민학교, 중학교 동창이고 그 중 셋은 문현여고, 한 명은 동여고, 나머지 한 명은 해운대여고 출신이지요)에서 가끔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저와 오O현은 대학진학으로 상경했기에 현재도 서울에서 그것도 얼마 전부터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홍O희는 부산(메트로시티)에서 거주 중입니다. 각자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지가 가까워지자 제가 어제 카톡방에서 황진이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을 언급하다, 국어 과목에 이어 외람되게도 선생님 함자까지 거론되었고, 그래서 저희 셋은 각자의 에피소드와 여러 기억의 파편으로 추억에 젖어들었고, 급기야 저는 오늘 선생님을 인터넷으로 검색하게 되었습니다. 퇴직하신 지 한참일 터이니, 근황을 알기란 쉽지 않겠다... 며 요행을 바랐었지만... '교육사랑'에서 선생님의 수필을 처음 클릭했을 때의 그 기쁨과 설렘이란! 다시 선생님의 예전 목소리를 듣는 듯했습니다. 아니, 사실 저희는 고등학교 동안 선생님의 글을 직접 접한 적이 없었지요. 당시 입시 환경에서 선생님은 국어책 속 수많은 저자의 목소리의 대변자이셨고 또한 저희와 이어주는 중개자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육성이 녹아있는 수필은 과연 선생님답게 깔끔하고 단호하고 논리정연하고 멋졌습니다! 스타카토가 적절히 배분된 경쾌한 왈츠를 감상한 느낌이었습니다. 인터넷 쓰레기 같은 글의 홍수 속에서 제대로 된 글을 만나기 힘든 요즘, 가끔씩 찾아갈 안식처를 뜻하지 않게 발견한 행복을 저는 지금 맛보고 있습니다. 더불어 동여고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하셨고, 퇴직하셨음에도 과연 2010년 올해의 참스승상도 수상하셨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서른 살인 홍O희 딸도 동여고 출신이랍니다. 솔직히 선생님께서 교장이셨던 학교는 어떨까 상상이 잘 안 됩니다^^   첫 메일임에도 소녀처럼 들떠서 수다쟁이가 되었네요. 선생님, 모쪼록 건강하시고 또 메일 드리겠습니다~ 이O희 올림 PS, 선생님, 행여 서울에 오실 일은 없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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