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소통 - 이 드라마1 김영국  (Homepage) 2024-02-14(수) 09:47:51, 49438

모처럼 내 취향(잔잔 훈훈 달달)에 딱 맞는 드라마를 만났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폭력, 음모 따위 없이 ‘잔잔’하고, 우정과 배려가 ‘훈훈’하게 넘치는 가운데 ‘달달’한 로맨스가 펼쳐지는, 나에게는 꿈 같은 드라마였다. 정우성을 빼고는 대부분 저예산 영화에나 나올 법한 낯선 배우들이라 오히려 더 친근하고 리얼하게 다가왔다. 눈부시게 예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끌어당기는 여주인공 신현빈, 밋밋한 스토리에 반짝반짝 빛나는 대사로 시청자를 놓아주지 않는 김민정 작가를 만난 것은 덤이다. 나쁜 놈, 나쁜 x 한 명 없이도 16부작 드라마가 무난히 완성된다는 것도 놀라운 발견이다.   청각장애 화가 차진우와 수어도 모르는 배우 지망생 정모은이 만나 사랑하는 얘기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소통’을 생각했다. 두 사람의 소통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초보의 수어, 필담 등으로 썸을 타고, 감정을 주고받고, 속마음을 나누기가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리고 그 소통이 얼마나 불완전했을까. 그러나 드라마에서 두 사람은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하고 불완전한 소통이 두 사람의 사랑을 더 깊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대화 중에 최대한 서로에게 집중한다. 모은은 진우의 수어 한 동작이라도 놓칠까봐, 진우는 모은의 입의 움직임을 놓칠세라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는다. 그러고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서로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한다. 어찌 사랑이 깊어지지 않겠는가. 인간의 언어가 세상의 진실을 담아내기엔 옹색한 그릇이라고들 한다. 석가모니는 깨달음의 실체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 설법 중 연꽃 한 송이를 들었다. 다 멀뚱멀뚱하고 있을 때 제자 가섭만이 알아차리고 빙그레 웃었다는 ‘염화시중의 미소’ 얘기도 언어라는 도구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보여준다. 언어 자체의 태생적 한계에다 개인의 부족한 언어능력이 더해져 세상의 소통은 불편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다들 상대방 때문에 소통이 안 된다고 열을 올린다. 이 드라마에는 진우와 모은이 말고도 진우에게 그림을 배우는 청각장애 학생들도 나오고, 진우의 절친 기현이는 청각장애 아내와 산다. 그런데 그들의 세계는 하나같이 평화롭고 다정하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겠지만 적어도 이들은 자기의 언어능력(표현과 이해)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소통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살기 때문에 소통에 따른 갈등이 적은 게 아닐까. 장 크레티앵(1934~)은 1993년 캐나다 총리로 취임하여 내리 두 번 연임하고 2003년 총리직, 당총재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정계를 은퇴했다. 어릴 때 워낙 가난하여 안면마비, 말더듬을 치료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20대에 하원의원에 도전했다. 상대 후보자가 가장 아픈 부분을 공격했다. “그런 언변으로 어떻게 민의를 대변할 수 있겠느냐?” 크레티앵은 그 공격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제가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거짓말도 못 합니다.”  이 대답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그는 승승장구했다. 사실 달변보다 눌변이 오히려 감동을 줄 때가 많다. 빈자리를 스스로 메워가며 듣게 되고, 제대로 드러내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표정에서 진정성을 느끼기 때문이리라. 말더듬는 사기꾼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래서 나는 소통수단이 지금보다 불편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수어를 필수과목으로 채택하여 온 국민이 몇 데시빌 이상의 대화나 논쟁은 수어로 하도록 법으로 강제하면 어떨까. 세상이 저 드라마처럼 잔잔하고 훈훈하고 달달해지지 않을까. 허풍선이들의 허풍으로 세상이 워낙 시끄러워 허황한 생각을 해보았다.      말하기 좋다하고 남의 말 말을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무명씨 <청구영언>에서 *뱀발: 연식이 오래된 분은 ‘무명씨’를 잘 알 것입니다.     옛날엔 작자 미상의 고시조에 무명씨라는 이름을 붙여 교과서에 실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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